조선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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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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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구분의 피료썽 때문에 최근 이것을 ‘조선중화주의’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17세기의 소중화의식은 형식논리면에서 조선중화주의의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명의 그림자, 즉 ‘숭명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의식이라기 보다는 중세적 culture보편주의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같은 조선중화론이라고 하더라도 17세기 이전의 성리학자와 18세기 실학자들 간에는 질적인 change(변화)와 함께 논리의 세련도와 체계화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양자의 이 차이는 중세적 국제관과 근대적 국제관념을 가르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Ⅲ. 18세기 실학파의 대외인식
18세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평화가 정착되었다. 실학파의 …(To be continued )
조선후기실학파의대외
조선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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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에 대한 글입니다. 이는 명분론에서 벗어나 국제정세를 현실적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 일부 실학자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이 시기 청의 발전상은 연행사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고,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도 전래되었다.조선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에 대한 글입니다. 삼번의 난(1673-1681)을 진압한 청은 강희ㆍ건륭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조ㆍ일관계도 안정되었다.조선후기실학파의대외 , 조선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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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인문사회
다.
설명
Ⅰ. 머리말 Ⅲ. 18세기 실학파의 대외인식
Ⅱ. 실학파 이전의 대외인식 Ⅳ. 맺음말
그런데 같은 소중화의식이라 하더라도 조선전기의 그것과 후기의 것은 내용상 차이가 있다 17세기의 이 소중화의식은 조선이 바로 ‘중화’라고 주장한 점에서 ‘조선중화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의 경우 소중화가 ‘중국(中國) 다음’이라는 의미가 강하였다면 17세기의 그것은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key point(핵심) 이다. 이와 같이 현실과 괴리된 북벌론과 소중화의식의 국제적ㆍ국내적 모순에 대해 내부적으로 반성이 일어났다.(그림 3 참조) 기존의 중화주의적 화이관에 조선을 대입시켰을 뿐으로 국제사회에서의 현실성과 대등한 국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족적ㆍ지리적 화이관을 완전히 극복하고 culture중심의 화이관과 결합되면서 ‘조선중화주의’가 보다 체계화되는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실학파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당시까지도 조선은 반청북벌론과 자존적인 소중화의식으로 인해 중국(中國)culture를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